[나를 묻다] "감정을 잘 들여다보면"

[나를 묻다] "감정을 잘 들여다보면"

[나를 묻다] 조현준

독일의 심리학자 프리츠 펄스(Fritz Perls)에 따르면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은 오직 현재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현재를 살 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렇다면 현재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도록 돕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과거의 경험으로 구성되고, 미래를 계획하며 살아가지만 그 사이의 현재에 초점을 두지 못할 때 혼란스러워진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우울을, 미래에 대한 예측은 불안을 낳는다. 그러나 이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늘 현재를 가리킨다. 감정이 과거나 미래로부터 비롯되더라도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금, 여기의 나이기에 감정은 늘 현재에 있다. 때문에 감정을 민감하게 자각하는 것은 나를 현재에 머물도록 돕는다. 감정에 대한 인식은 현재의 나에게 힘을 싣는다.

조현준은 자신의 감정에 민감하다. 그에게는 감정 그 자체를 따르는 힘이 있고, 그의 이야기에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솔직하게 담겨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들 사이에서 '감정'을 찾아 마주하는 용기는 그를 현재에 집중하게 한다. 현재의 고민에 대한 실마리는 항상 그의 감정 속에 있다. 그는 감정을 통해 현재에 힘을 가지며, 과거에 마침표를 찍고 앞으로 나아간다. "나아갈 일밖에 없어."

조현준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 이름을 소개해줄래?

"내 이름은 조현준이야. 조나라 조(趙), 밝을 현(炫), 높을 준(峻)이야. 원래 ‘나라 조’라고 많이 쓰더라고. 근데 나는 ‘조나라 조’라고 알고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어. 그래서 왜 조나라인가, 나는 조나라 출신인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 (웃음) 준은 보통 준걸 준을 많이 쓰는데 내 이름은 높을 준이라 남들이 안 쓰는 거라서 좋다고 생각했어. 나는 내 이름이되게 부드러운데 단단한 이름이라고 생각해."

-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왔네. 지난 여름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날이 있어?

"내가 더위를 많이 타니까 여름에 항상 더운 게 걱정이거든. 근데 군대를 갈 때 8월이라서 다들 걱정을 많이 했어. 진짜 더워서 나 어떡하지, 군복 입고 훈련을 어떻게 받지, 그런 상황이었지. 근데 군대 딱 가고 나서 그날부터 낮에 뜨겁긴 한데 이글거리는 뜨거움이 아니라 잔잔한 뜨거움이고 밤에는 시원해지는 거야. 그리고 딱 그맘때쯤 저녁 하늘이 정말 예뻐지거든. 하늘이 매 순간순간 너무 예뻤어. 사람이 제일 스트레스였는데 유일하게 같이 모여 하늘을 보는 게 이 상황을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이었지. 그래서 그때 여름이 제일 기억에 많이 남아. 그때의 아련한 느낌을 가지고 가을을 맞이하는 거지."

"그리고 9월도 꽤 덥거든. 근데 그 여름날에 엄마아빠가 진주로 면회 왔다가 갈 때가 기억나. 그때 밥을 먹고 1시간 뒤에 바로 엄마가 소고기를 사멱여서 보냈거든. 엄마, 아빠는 주차장에서 가고, 애국가가 울리고, 나는 막 헛구역질 하면서 울면서 가는데 그때 그 감정들이 나한테는 되게 자유로웠던 것 같아. 생각보다 내가 기존에 하던 일들, 학교,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서 돌이켜 보면 되게 좋았던 기억인 것 같아."

-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웠어?

"나는 옛날에 관계적인 측면에서 되게 많이 얽매였던 편이야. 그래서 내가 맺고 있는 관계가 안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관계 간의 거리를 조율하는 데에 되게 많은 부담을 느끼고 신경을 쓰고 있었던 거지. 왜냐면 나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는 고리들이 내 인간관계였으니까. 그래서 그 모든 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는데, 그거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었어. 갈 때는 그걸 끊고 간다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오히려 관계를 멈춤으로써 다시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이 됐겠지 싶어. 이제는 그게 부담이 아니라 나의 힘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땐 그랬어."

-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사진으로도 남기는 편이야?

"아니. 나는 누구한테 내가 보는 이걸 같이 보고싶다고 했을 때 남기고, 가족 사진이나, 사람에 대한 사진을 많이 찍고 풍경은 잘 안 찍어. 왜냐하면 풍경은 나만 간직하고 싶어. 내가 보는 이 쌍무지개를 이 사람이 봐서 이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내가 느끼는 감정만큼이지 않을 때 내 감정의 크기가 작아질 것만 같아서 그냥 나만의 크기로 놔두는 거지."

- 식물을 키우면서 생명의 기쁨을 느낄 때 힐링되는 느낌을 받곤 해. 키워보거나 가꿔보고 싶은 게 있어?

"바질을 키운 적이 있어. 걔네는 계속 졌다 폈다 하고 있어. 나중에 내가 꼭 책임질 수 있는 식물들을 잘 구성해서 가꿔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 근데 강아지나 고양이는 잘 모르겠어. 왜냐하면 귀여움만으로 뭘 키우는 게 나한테 좀 소비적이야. 동물한테 가는 감정이 매우 단순하지 않은데, 내가 강아지한테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그러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이 들어서. 무언가를 키운다는 건 정말 나의 전부를 걸 만큼의 사랑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키운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명이라는 게 담겨있잖아. 나는 누군가에게 기꺼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거든. 엄마아빠에 의해 자라서 그럴 수도 있고. 그냥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곧 헌신이고 그걸 쏟는 거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 그런지 의존적인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아. 그래야 내가 자기중심적일 수도 있는 것 같아.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건 내가 헌신하는 것,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지. 근데 누군가 나에게 그런 부담을 지어주는 것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이 있어. 그래서 동물의 삶이 나에게 전도되어 있다는 게 되게 부담스러워."

- 주로 어떤 걸 하면 힐링이 돼?

"혼자 살면 내 텐션이 많이 다운될 수도 있겠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의 하루의 감정이 되게 낮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보니까 안 괜찮아도 괜찮은 거야. 항상 괜찮아보이지 않아도 되고, 그래서 오히려 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혼자 있는 것 자체가 힐링이 되는 것 같아. 평소에 힐링을 잘 하면서 사는 것 같아. 하루하루 삶과 내 감정을 잘 들여다보고, 그게 어그러질 때 힐링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아."

-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 같아. 현재 나의 기분을 1순위로 두는 거지.

"사실 내 우울은 생각보다 나의 모든 걸 무너뜨릴 정도로 깊다고 생각해. 근데 나는 그 과정이 엄청 빨라. 그 이유는 그걸 잘 인식해서라고 생각해. 기분이 너무 안 좋다, 너무 우울하다, 그거에 그냥 흠뻑 빠져서 무너질 것 같이 그 감정을 고민하다가 시간이 지나고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다 보면 금세 괜찮아질 이유들이 생기거든. 괜찮아질 명분들이. 그러면 너무나 쉽게 괜찮아져. 힐링이라는 건 날 억압하던 것들이 잔뜩 쌓여 있다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때 하는 어떤 한 포인트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항상 그것에 대해서 힐링이라고 할 것 없이 나의 삶을 굴곡지게 사는 것에 익숙한 편이라서. 굳이 내 삶을 더 낫게 할만한 어떤 한 포인트를 설정하지 않는 거지. 일상과 구분을 두지 않는 거지. 다 잊고 싶어, 다 떠나고 싶어 이런 게 없어."

- 삶에서 익숙하고 편한 게 있다면?

"교회. 내가 뭘 하든 괜찮은 곳에 있다는 건 너무나 축복받은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해. 교회에서 열심히 노래를 불러도 괜찮고, 열심히 즐거워도 괜찮고, 슬퍼도 괜찮고, 열심히 이 말씀이 이런 뜻 아니냐고 얘기하는 것도 너무 좋아. 그런 게 나한테는 제일 익숙하고 편한데, 교회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게 좀 확장되고 있는 것 같아. 사실 교회에서 한 가지 안정적인 어떤 포인트를 잡은 것 같고 이제는 나를 알고 있는 어떤 집단, 공동체 안에서 내가 있는 게 너무나 편한 일이야. 가족, 피스오브피스도 날 너무 잘 알고. 이런 것들이 날 자유롭게 하는 거지. 날 안다는 게 무슨 의미냐라고 한다면 그들의 방식대로 날 편하게 대한다는 거지. 경계심 없이, 이 사람이 말하는 게 오해가 될 수 없다는 거, 내가 말하는 게 오해가 되지 않는다는 게 편한 일인 것 같아."

- 마음껏 나다워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얘기 같아.

"결국에는 매 순간 나다웠으면 좋겠어라는 말보다, 우리가 바라는 건 나답지 않은 순간들을 원하지 않는 것 같거든. 그것이 어떤 긍정으로 치환이 돼서 나다웠으면 좋겠어라고 하는데, 나다움이라는 얘기를 하다보면 행위 같잖아. 그래서 자꾸 나다움을 위해 노력해야 되는 것 같은데, 난 나다운 건 본래 머무르기만 해도, 그냥 피어있기만 해도 되는 게 나다움이면, 우리가 투쟁해야 되는 거, 나의 평화를 위해 싸워야만 하는 거, 쟁취해야만 하는 건 나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제거하고, 나답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과 싸우고, 그걸 반드시 이뤄내야만 하는 행동인 거지. 나답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 그러다보면 나다움이라는 건 그냥 완성이 되어있는 거지."

"그래서 20대 때 해야 될 일이 그 투쟁이 아닐까. 나답지 못하게 하는 것들과 싸우는 거. 그러면서 내가 나다웠다는 건 뭔지, 나의 소명이란 뭔지를 스스로 고민하는 거. 근데 자꾸 밖으로부터 상처를 받잖아. 그러다보면 내 세계가 작아지는데, 그게 내가 바라는 나다움인지는 내 안에서 고민하는 것 같아. 그게 억압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 상태도 괜찮으면 괜찮은 거지."

- 불쾌함에 민감한 것이 나다움을 알아가는 첫 번째 스텝인 것 같기도 해.

"좋아하는 걸 이야기하는 건 쉬운데, 싫어하는 걸 이야기하는 건 어려운 것 같아. 근데 결국 조금 알게 된 건 나를 불편하게 만든 모든 것들도 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는 것. 의도가 있는 말들은 아니었다, 그냥 그 불편함을 내가 못 견디는 거지. 그래서 세상이 나에게 가지는 악의는 없다는 게 내가 깨달은 거지."

- 남은 한 해에 대한 바람이 있다면?

"나아가야지. 나아갈 일밖에 없어. 오늘까지만 해도 나는 길이 두 개였어. 그 동안 흔들렸던 이유가 '이걸 하면 저게 어려울 텐데, 저걸 하면 이게 어려울 텐데' 이렇게 나도 길이 두 개라고 인식했고, 세상 모두가 그걸 두 개의 길로 인식하기 때문이야. 근데 이젠 길이 하나임이 명확해졌고, 이제 안 흔들려."

- 나무에 비유하자면 스스로 어떤 나무인 것 같아?

"보호수. 100년 된. 거대하고 울창해서 사람들이 사진 찍고, 그늘에 기대고, 올라타고, 비밀이 있을 때 와서 속삭이면서 얘기하고 그런 거. 그런 모든 걸 다, 모든 세상을 안을 수 있으면 좋겠어."